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걸프 전쟁 (문단 편집) == 걸프전과 한국 == 베트남전 이후 처음으로 한국군이 파병된 곳이다. 국군 의료지원단 100여명과 공군 56항공수송단 '비마부대'가 파병되었다. [[대한민국 국군/파병부대]] 항목 참조 1991년 1월 23일, 경기도 성남 공군비행장에서 출국할 때만 해도 베트남전 이후 최초의 파병이니,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세계사의 주역이니 하며 띄워줬고, 사지로 간다고 해서 환송객은 물론 국군 장병들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파병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의식한 정부는 명령이 아닌 자원자를 모집하는 형식을 택하였고, 적지 않은 '특별 수당'도 제시하였다. '''그러나 전부 거짓말이었다.''' 일단 다국적군이 아니었다. 나무위키의 [[걸프 전쟁/다국적군 편제]]나 위키피디아 영문판을 봐도 한국군은 다국적군의 일원이 아니었다. 사실 노태우 정부에서는 전투병 파병 요구를 받았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우리 젊은이들의 소중한 생명을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전투병 의료지원단을 보냈고 이들은 다국적군 소속이 아니라 사우디로 간 일종의 의료봉사, 대충 그 정도 성격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원치않은 의료 봉사에 노골적으로 한국군을 무시하였고, 이에 '일단 파병한 뒤 현지에서 문제를 풀어보자'라는 막무가내 정신으로 출발하여 다음날인 1월 24일에 사우디 다란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 의료지원단을 외면하였고, 이에 일주일간 다란에서 대기하는 촌극을 빚었다. 사우디에서는 마땅한 곳이 없으니 후방으로 가라고 하였지만, 비장한 환송식까지 한 우리군은 그럴수는 없다며 고심 끝에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조건으로 그나마 쿠웨이트에 가까운 '알 누아리아'라는 작은 마을로 가서 의료 업무를 보게 된 것이다. 한국군이 다국적군이 아니라는게 무슨 뜻이냐면 [[UN]]으로부터 작전, 행정, 군수 등 모든 면에서 어떤 지원이나 혜택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후 복구작업 등 후속 조치 과정에 지분을 요구하기로 힘들었다. 어디까지나 '''다국적군이 아닌 사우디 배속군'''이기 때문에 보급도 사우디에서 받았다. 그 옛날 베트남전에 파병된 선배들은 강제로 미국 양식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름진 고기 못 먹겠다며 제발 김치 좀 달라고 아우성이었지만[* 당시 한국은 1식 1찬이라 국내에서는 밥 하나, 소금국 하나가 식사의 전부인 상황이었다.(식판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음) 그런데 파병가니 깡통에 든 고기(MCI)만 줘서 "쫄병들은 고기만 먹이고, 장교들은 야채 먹는다!"라며 [[반어법|행복한]] 밥투정을 하였다. 사실 주둔지에서는 미군처럼 식사를 조리하여 줘야 하는데, 한국군은 보급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평상시에도 100% 미군 전투식량만 주는 바람에 이건 이것대로 문제가 되었다.], 사우디에 파병된 병사들은 강제로 사우디 현지식을 먹어야 해서 제발 '향신료' 좀 빼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외에도 다국적군은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콘크리트 건물에서 생활하고, 한국군은 모래폭풍이 주기적으로 오는 사막에 텐트 치고 생활하는 등 무척 조악한 생활을 하고 있어 불만이 엄청났다. 게다가 국방부 측에서는 고국에다가 계속하여 다국군의 일원인 "의료지원단이 멋지게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UN은 물론 주둔지 주민들에게도 박수를 받고 있다."라는 거짓 보도자료만 줄기차게 내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약속했던 '특별 수당'이 없었다. 이 특별수당이라는게 베트남전 파병의 각종 논란의 핵심인 중요한 요소이다. 물론 지독히도 가난하던 베트남전때 처럼 단지 특별 수당을 받기 위해 파병 간 것은 아니지만, 약속이 깨진건 병사들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특별 수당을 안 준 이유는 무척 간단하다. 베트남전 당시 특별 수당은 미군이 수고 했다고 준 것이고, 걸프 전쟁에서는 다국적군 차원에서 지급되었어야 하는데 한국군은 다국적군이 아니니 특별 수당을 줄 주체가 없던 것이었다. 이에 파병된 한국군은 개판이 되어 목적도 없고, 사명감도 없고, 자부심도 없고 심지어 위계질서까지 없어졌다. 이들은 어디까지 목숨걸고 싸우겠다는 목적으로 걸프전 파병에 자원한 것인데, 막상 와보니 할일도 없고 '특별 수당'이라는 대우도 없기 때문에 순식간에 당나라 군대화가 돼버린 것이었다. 이 불쌍한 한국군을 위해 교민들이 나섰다. 처음에는 김치를 만들어 퍼 날라 우리 장병들을 먹여주었다. 그런데 배를 채운 한국군은 이번에는 사무 집기를 달라고 했다. 행정 일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갖고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 집기를 갖다주니, 다음으로는 승용차를 한대 구해달라고 했다. 군용트럭 말고, 연락 등에 이용할 승용차 1대조차 안 갖고 왔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로 거지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비참한 상황은 10년 후 이라크전에서도 반복 되었다. 세계 최강의 M1 전차와 브래들리 장갑차도 터져 나가는 상황에서 한국군은 60 트럭만 타고 나타났다. 이걸 본 미군이 경악을 해서 [[MRAP]]를 주며 그걸 패트롤 차량으로 굴리려고 하다니 제정신이냐고 말하면서 타고 다니라고 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번 평화 유지군 때도 또 60 트럭에 철판만 두르고 나타나 남는 MRAP 좀 있으면 적선 해달라고 동냥질을 하였다. 이런 목불인견의 현상이 매번 반복되었다. 이런 이유는 걸프 전쟁에서 다국적군의 일원이 아니기도 했지만, 자체적으로 아무 준비 없이 맨몸으로 병사들을 보내 놓고 진지한 반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차마 이런 문제를 방송에 내보낼 수가 없어, 병사들이 음식이 입에 안맞아 조금 힘들다는 정도의 한국 언론의 기사가 나가자 국방부 장관은 오히려 "전쟁터에 가서 어렵다니 정신상태가...."라며 [[똥별|격노했다고 한다]]. 이 다국적군 문제는 병사들은 사전에 전혀 몰랐다고 한다. 심지어 의료지원단장인 최명규 대령 조차 몰랐다는 말이 있다. 그저 청와대 일부와, [[이종구(군인)|이종구]] 국방장관, 그리고 협상대표였던 황 모 대령등 극소수 사이에서 쉬쉬하던 일이었다. 현지에 가서야 사정을 알게된 우리 군인들은 대놓고 정부를 비난하며 군기는 개판이 되었다. 이 문제는 전쟁이 터지며 어느정도 해소되었다. 일단 후세인의 사우디 침공 작전인 [[카프지 전투]]가 벌어지자 병원에 사우디 부상자들이 쏟아져 들어와 정신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병사들은 원하던 것은 전장에 나가 의료 지원을 하는, 바로 이런 일이었다. 목적 의식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특별 수당' 문제는 국방부의 '해외 연수' 예산을 전용하기로 했다. 파병된 장병을 일종의 해외 연수생 취급한 것인데 일단 돈을 받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던 사우디 전통 식사는 사우디 측에서 향신료를 빼주기로 하여 일단 먹을 수는 있게 되었다. 걸프전쟁 당시 전비는 미국쪽만 4~5백억 달러에 이른다. 전쟁 초기에는 미국 의회에서 비용 부담이 부결되어, 당장 필요한 결재 대금을 못내 미군이 파산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대신 세계 각국이 비용 부담을 매꾸어주었는데 사우디아라비아가 1백68억 달러로 가장 많았고 쿠웨이트 1백60억 달러, 일본이 1백7억 달러 순이며 한국은 5억 달러를 부담하였다. 이중에서 일본은 천문학적인 전비만 부담하고 실제 파병은 안해 국제 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일 기회를 잃었다며 일본내 우파들이 두고두고 비난하였다. 한국은 원래 전비 부담 요청도 이라크에 대한 금수 조치로 퉁 치려고 하였으나, 미국측이 강력하게 "너희 나라는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중동 평화의 반사 이익을 얻으려 하는가”라고 하여 결국 5억 달러를 부담한다. 즉 미군 및 다국적군이 받았던 특별 수당의 일부는 한국측에서 부담한 것이고, 정작 파병된 한국군은 못 받았다는 것이 아이러니. 쿠웨이트에도 교민들이 꽤 살고 있었는데 현지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피난 안가고 남은 사람들은 9명이었다. 후세인이 쿠웨이트에 남아 있던 외국인들을 인간 방패로 쓰겠다고 공언 하였기 때문에 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한번에 다 죽을 수 없다며 흩어져 지냈는데, 쿠웨이트가 해방되자 바로 한국 대사관에 모여 감동적인 대사관 태극기 계양식을 지켜보게 된다. [[소녀시대]]의 [[써니]]가 3살 때 이 전쟁을 쿠웨이트에서 겪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급거 귀국하였으며, 현재도 폭죽 소리가 들리면 [[PTSD|심하게 놀란다고 한다]]. 멤버들이 귀를 막아 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걸프만 일대의 우리 교민들을 대피 시키기 위해 4차례나 특별 전세기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현장을 지키라는 [[정주영]]의 지시로 일부 현대건설 직원들은 오히려 특별 전세기를 타고 사우디로 날아갔다. 하위직들이 죄다 못가겠다고 사표를 써서 임원들만 갔다고 한다. 전쟁을 위해 사우디내 대규모 수송이 필요 했는데, 미군은 이를 민간 수송에 의존하였다. 이때 운전사중 일부를 한국에서 모집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